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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여는교회

목회자코너

2024.07.27 01:45

(761호) "숲과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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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생각의자 761> 2024. 7. 28

 

숲과 나무"

 

우리가 사건이나 환경이나 상황을 보는 관점을 이야기 할 때 전체 "큰 그림"을 보는 것과 동시에 섬세하게 "세부적인 것"도 볼 줄 알아야 바른 "분별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관점의 범위를 은유적으로 "숲과 나무"로 표현합니다. 목회자를 비롯해서 공동체의 지도자라면 누구나 이런 관점의 범위(Spectrum)를 가져야 분별이 가능하고, 그 범위가 넓을수록 그 지도자의 스케일이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숫자적으로 한국인이 별로 없는 소도시의 이민교회는 공동체마다 사람들의 성향, 소유, 배경 등이 아주 다양합니다. 왜냐하면 선택할 교회의 수가 적기 때문에 한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사람의 영향이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숫자적으로 한국인이 많이 모여 있는 대도시의 이민교회는 사람들의 성향, 소유, 배경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교회가 많기 때문에 한 교회에 "비슷한" 성향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사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비록 교단과 지역과 문화적 영향이 다양해도 워낙 교회들이 집약적으로 많기 때문에 공동체의 특징이 쉽게 드러나 있고 선택의 어려움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다양한 교회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숲과 나무의 그림 가운데 어디에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목회가 될 수도 있고 힘겨운 노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영혼 구원도 잘 되고 여러가지 면에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부정적인 표현이나 몇 사람의 잘못된 주장을 마음에 두고 고민하는 것 때문에 정작 중요한 목회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사실 종교 생활에 굳어졌거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우매한(?) 공동체는 어차피 문제도 아닌 것을 문제 삼아 엉뚱한 방향으로 교회 영성이 흘러가게 됩니다. 반대로 영혼구원에는 관심도 없고 성도들은 아파하고 있는데 좋은 말만 들려주는 몇 사람을 주위에 두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다가 문제가 드러나자 수습을 못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영성이 전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또는 침체되고 있는지를 좀 더 객관적으로 살피고 알 수 있는 방법(심방, Survey, 목장 목회일지, 목자 면담 등...)들을 부지런히 개발하고, 교인 숫자에 따라 목회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배우고 개발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특히 가정교회는 일반교회에서 젖었던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 같은 영성과 늘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감정적 습관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고치는 방법으로, 피해 가던 것을 오히려 직접 부딪쳐서 문제 해결을 경험하게 하고, 한계를 느낄 때 오히려 한계를 도전해서 극복했을 때 성령님이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는 방법을 많이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큰 그림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는 긴박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별력을 최대한 예민하게 곤두세워서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한 나무씩 잘 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삽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를 통해 예전에는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개인적으로 마지막 때라는 감각으로 복음을 목숨 걸고 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전쟁이나 질병이나 교회의 극단적 타락이나 인간의 우매함이 마지막 때라고 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미 세계 방방곡곡에서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마지막 때의 현상을 실시간으로 보고 체험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숲과 나무를 보는 관점이 중요해 진 것 같습니다.

세계의 온난화 현상으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날씨의 현상이 엄청난 파괴를 만들었다든지, 과학의 발달로 누린다는 편리함이 한 회사의 컴퓨터 고장으로 전 세계가 순간적으로 마비되는 일이나, (그래서 지금 저도 공항에서 8시간째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음) 인간로서는 상상으로 초월하는 변태적인 인간의 죄악이나, (한 남자를 통해 천명 이상의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대부분 동성애자 가정에 자녀로 삼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되었음에도 동성애 문제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스런 부부가 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라든지) 한 번의 태풍으로 수많은 집에 전기가 끊어져 냉동했던 엄청난 양의 음식물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나, 오늘도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인신매매나 나라 전체 국민을 정치적 노예로 전락시키는 처절함을 경험하는 현실 등, 정말 인류 역사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는 긴장된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를 통해 "작게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 한 영혼을 섬기는 일에 더욱 즐거움으로 동참하는 삶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도 즐겁지만, 동시에 앞에 열거한 마지막 때라는 큰 숲을 보며 더욱 심판의 절박함이 에너지가 되어 한 영혼이 돌아오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공동체를 더욱 잘 세워 나갈 것을 결단하게 됩니다.

 

(북미 가사원장 김인기 목사님의 최근 원장 칼럼입니다. 한주간 병원에 입원하면서 종말의식이 무디어진 현대 교회와 교인들의 삶이 왜 무능하고 어떤 문제들에 대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장마기간에 엄청나게 창문을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광경을 병실에서 물끄러미 보면서 언젠가 저렇듯 폭포처럼 쏟아지는 심판의 날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때에 나는 과연 그 심판준비를 잘 하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신약교회 성도들의 인사말 가운데 <샬롬 = 평강이 있을찌어다>과 아울러 평소에 잘 사용했던 인사가 <마라나타 =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였다고 합니다. 가끔 삶공부를 하다가 주님이 오늘밤에라도 오시면 이 세상에 대해 미련이 없을까요?’라고 물으면 주님이 어서 오시면 좋죠라는 대답도 있지만 아니요, 지금 오시면 안돼요. 제가 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요라고 말하는 분들도 상당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인즉 그분이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충실하게 살다보니 <종말의식>에 대한 긴장이 없이 성실하게 살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큰 그림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결국 주님이 다시오시는 날이 반드시 오기에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성경적인 확증과 확신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주님이 지금 오늘밤에라도 오시면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으로 들림받을 수 있겠다는 믿음의 고백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종말의식 가운데 최선을 다해 주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간절함과 절박감의 에너지가 도리어 자연스러운 영성과 생활화된 헌신으로 나타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

모든 일에 사랑!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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