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생각의자 751호> 2024. 5. 19.
“사람의 변화가 우리 사역의 목표여야 합니다”
가정교회 사역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한 사람의 삶의 변화를 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정교회를 하는 교회들은 다 그렇겠지만 우리 교회도 침례 간증, 목장 간증,선교 간증, 삶공부 간증 등등 간증이 많은 편이고, 그 간증은 보통 수요예배에서 듣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4-5편의 간증이 정말 한편한편 주옥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보면 대부분이 변화에 대한 간증입니다.
그런 수요예배 끝에 기도의 자리에 앉으면 기도보다는 감동으로 인해서 눈물을 펑펑 쏟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나도 모르게 이런 사역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다시 한번 제 자신을 재헌신을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사람의 변화는 우리가 지치지 않고 사역하도록 만드는 핵심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역은 사람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몇 가지만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사역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잘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목회자 가운데서도 알게 모르게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저변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설교는 뭣하러 하는 것일까요? 또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법인데 정말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그리고 무슨 사역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됩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지요.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분명히 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역을 하든지 사람이 변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는 아닐지라도 분명한 목표 중의 하나여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를 할 때에도 내 설교를 통해서 사람이 변할 것이라는 꿈을 꾸어야 하겠지요. 유명한 설교학 교수인 해돈 로빈슨은 한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 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어떻게 변하기를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머릿속으로 그리라고 권고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신학적인 지식이 늘든지, 고정 관념이 바뀌든지, 아니면 행동을 바꾸겠다고 결심하든지, 어떤 것이든 구체적인 변화를 목표하라고 합니다.
저 역시도 자주 그 목표를 잊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를 준비하다가 멈추고 내가 이 부분을 통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변하기를 소원하는 것이지? 하고 물을 때, 그제서야 준비하던 설교의 방향이 잡히고, 설교의 톤이 바뀌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설교가 변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되면 안 되겠지요. 왜냐하면 변하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마음 상하고 마음이 닫히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가 지적이 되면 안 되고 깨우침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잘 풀어주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원을 전달할 때 그것이 깨우침이 되고 사람은 변할 것입니다.
그것은 삶 공부도, 또 다른 사역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사역을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사람이 변할 것을 소원하고, 실제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목자/목녀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하기를,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이 사람이 이런 면이 바뀌기를, 그리고 단기 봉사 선교를 통해서 이 사람이 구체적으로 이렇게 변해서 돌아오기를 축복하고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다름이 아닌 목회자인 나 자신의 변화를 소원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일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변화를 소원하면서 사역을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 스스로는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사도 바울의 염려(고전 9:27)가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는 보통 깨달음에서 온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보통 권하는 것이 독서, 글 쓰기, 그리고 강연 듣기 등 세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인간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책과 강연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글 쓰기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왜냐하면 글을 쓸 때 생각이 정리가 되고 그 정리가 된 생각은 보통 나의 깊은 깨달음으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자신을 변화시키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교적 책을 많이 읽는 부류의 사람이고, 또한 우리는 매 주일 목회자 코너로, 설교문 작성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리고 매 주일 강연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변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뭔가 방향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고 있던지, 설교와 글 쓰기가 내 안의 깊은 깨달음이 아니라 목적없이 하루하루 때우는 일상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서도, 글쓰기도, 그리고 설교도 결국은 나의 깨달음과 나의 변화에 초점이 먼저 맞추어 져야 하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의 사역이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가사원에 올라온 국제가정교회 사역원장인 이수관 목사님의 칼럼을 읽고 매우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맞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숱하게 많은 시간 공을 들여서 설교를 준비하고 묵상을 보내고 삶공부를 통해 가르쳤어도 정작 내 자신이 그것을 일상처럼 여기고 변화의 0순위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생각과 행동의 일탈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에 너무 지나쳐 왔구나하는 생각에 죄의 낙(기쁨)에 대한 후회와 주님의 기쁨이 되지 못했다라는 곤비함이 무척이나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경험하였기에 왜 성경이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고 강조하는지를 다시금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 말씀이 쓰나미처럼 큰 파도로 다가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 접하는 담목은 우선은 제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설교하고 묵상하고 공부하고자 몸부침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작 제 자신이 사람의 변화를 소원하면서 사역을 하지만 정작 제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이요 주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을 역행하는 불순종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믿음이 우리가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넘쳐 진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을,
모든 일에 사랑을!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