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생각의자 711호> 2023. 8. 13.
“말과 기억력을 지혜롭게 다루기”
목회를 하면서 <3자 대면>이라는 것을 서너 번 해 본적이 있습니다. 양자가 서로 상대방을 비난할 때 보면 너무나 극명하게 말이 갈리는 때가 있습니다. 한 쪽은 상대편이 이러이러한 말을 했다고 하고, 다른 쪽은 그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라고 합니다. 듣다 보면 화가 나지요. ‘둘 중에 한명은 분명히 거짓말쟁이구나. 이렇게 괘씸할 수가 있나. 내가 거짓말쟁이를 밝혀 내리라.’ 이런 마음으로 <3자 대면>을 해 보지만 한번도 만족한 결과를 얻은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의 말과 기억>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단 말에는 다섯가지의 다른 메시지가 있다고 하지요. 첫번째가 내가 원래 하려고 의도했던 말, 오리지널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내 입에서 나가지 않습니다. 말솜씨의 부족으로, 또는 당시 상황에 따른 압박으로 조금씩 왜곡이 됩니다. 그래서 두번째는 실지로 내 입에서 나간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말한 사람은 자기가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려고 했던 말과 입에서 나간 말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번째는 자기가 말했다고 믿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지고 새로 쌓이기를 반복합니다. 따라서 내가 A라고 말했더라도, AA라고 말했더라면 좋았겠다 싶어서 ‘내가 AA라고 말 했어’라고 한번만 얘기하면 그 다음부터는 기억력이 왜곡이 되면서 본인이 AA라고 얘기했다고 철썩 같이 믿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얘기한 사람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듣는 사람은 또 자신만의 필터를 가지고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A라고 말했더라도 만약 이 사람이 Aa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면 Aa라고 듣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네번째는 그 사람이 실지로 들은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들은 사람의 기억력도 시간이 가면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여러가지 생각들과 다른 사람과의 대화들을 통해 내가 분명히 들었다고 믿는 메시지가 다섯 번째의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메시지가 다섯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메시지들이 본인의 기억력 왜곡으로 인해서 이리저리 바뀌기 때문에 둘 중에 한 명 거짓말쟁이를 찾아내겠다고 생각하며 불렀던 <3자 대면>에서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고 끝이 나기 일쑤였습니다. 한 사람은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고 하고 상대방은 난 절대로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합니다. 결론은 둘 중에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둘 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기억과 메시지에 오류가 있을 뿐인 것이지요.
이것을 알고 난 후에는 제가 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했다고 전해 들을 때, 일단은 별로 흥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고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사실 안 그럴 사람이 그랬을 때 상처가 큰 법이지요)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응~ 당신이 잘못 들었을 거야’ 아니면 ‘응~ 말이 의도치 않게 나왔을 거야, 그런 의도로 한 얘기가 아닐 거야’ 그렇게 얘기하고 나면 기분이 한층 좋은데, 사실은 기분 좋자고 자기 만족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얘기를 했다는 말이 들려서 그에게 확인을 했을 때, 본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면 저는 ‘거짓말 하지마!’라고 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의 말을 믿어 줍니다. 말에는 실수가 있어서 의도하지 않은 말이 입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말에 대해서 분란이 일어날 때는 두 사람 말을 다 믿어주고 더 이상 그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합니다.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사람의 기억력이 믿을만 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 기억력 역시도 믿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분명히 이렇게 얘기했는데 아내가 아니라고, 저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면 혼돈이 되기 시작하고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없이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악한 사람의 모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억력의 오류를 배려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꼭 메모해 두려고 하고, 누군가가 내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면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럴 때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제가사원장 이수관 목사님의 원장칼럼입니다. 개인적인 경험도 그렇고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원장칼럼을 통해서 제 자신이 가져야 하는 마음자세를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성품으로 나타나기에 우리가 우선 <말을 잘 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잘 하고서도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자기 의가 쉽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 어떤 결과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도록 하는게 제일 중요한 가치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목표와 목적의식을 상실하게 되면 목장과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역이나 섬김 등의 하나님을 위한 일들이 결국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들이 되어버리고 그것에 대해 인정받지 못할 때에 억울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기 마련이기에 질서를 존중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통해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예수쟁이(?)라는 사실을 잊지않고 어떡하든 자신은 숨기고(죽이고) 다른 이들을 세워주며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하며 기대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을,
모든 일에 사랑을!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