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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생각의자 697> 2023. 5. 7.

 

Contract (계약)Covenant (언약)"

 

여러번 언급했지만 한국 문화 속에는 실제적 삶과는 거리가 멀 수 있는 체면이나 남의 평가에 예민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명분적 사고"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이냐, 예수님의 마음이 공동체 가운데 느껴지느냐, 나의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을 체험한데서 오는 담대함와 유연성을 사람 관계에서 즐기느냐를 실제적으로 점검하기 보다,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감정적 흥분이 쉽게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하면 자신도 따라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는 경향이 많습니다.

저는 미국 문화 속에 살아가는 한국 이민 교회를 목회하면서 우리가 행동하게 하는 문화적인 성향과, 가치를 결정짓는 사고의 방향을 발견하고,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재 조명하고 그 단어들이 가지는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내용을 실제적인 측정이 가능한 단어로 바꾸는 방법으로 생각을 바꾸는 노력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직분을 부르기보다 형제자매라는 가족적인 호칭을 사용했고, 모든 교회 모임을 기도회로 바꾸고,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다수결보다 따뜻한 마음이 표현되는 박수로 대신했습니다. 교회 회중이 담임목회자를 결정하는 청빙이나 신임투표 같은 방법은 교회를 갈라 놓고 하나님 보다 사람의 생각을 모으는 방법 임을 현실적인 예를 들며 자세히, 그리고 누누히 설명하고 부족한 목회자나 이웃의 삶을 격려하고 세워가는 영성을 기르는 방향으로의 연습이 중요함을 설득해 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자신의 성경적 자세와 성숙함의 상태를 스스로 측정하고 인식하는 능력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문제 자체를 보기보다 문제를 만드는 원인이 뭔지를 분별하고, 보통 쉽게 사용하는 언어로 그 문제를 드러내 보여주면서, 그 문제가 만든 결과가 얼마나 자신과 이웃을 힘들게 하는지를 서로 인식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연습의 과정을 거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실제적으로 인식하도록 대화를 끌어가려고 노력하는 목회를 해 왔습니다. 자신 안에 갖혀 있는 집착이나, 소위 "고집"이라고 하는 삶의 그림에 자신을 묶어 두는 사람과는 이런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도 가끔 보았지만, 대부분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일반적(?) 용어들이 가진 추상적인 표현을 측정과 체험이 가능하도록 새롭게 조정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다보니 생각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목회 가운데는 "YesYes가 아니고 NoNo가 아니라"는 애매모호한 경우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거절해 놓고 좀 더 강하게 삼세번 부탁하지 않았다고 섭섭해 합니다. 식사하겠냐고 물었을 때 식사하자고 하면 될 것을, 안 먹겠다고 해 놓고 자기 빼 놓고 먹었다고 섭섭해 합니다. 이런 문화적 갈등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로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말하는 연습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격려하고 축복해서 그 사랑의 에너지로 세상에 복음를 전해야 할 교회 공동체가 애매모호한 태도와 명분만 내세우는 문화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서로 불신하는 관계를 "정상"인 것처럼 변질되어 거의 운명론에 빠지듯 "교회는 다 그런거야"식으로 체념하는 말을 절대로 못하도록 자주 드러내고 고쳐나가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목사인 저도 인간인지라 말 실수도 많았고, 본의 아니게 오해도 샀지만, 우선 저부터 분명히 YesYes 하고 NoNo하는 투명한 목회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했고, 누가 뭐래도 교회를 흔들려는 소문이나 공격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막아 왔습니다. 이를 통해 결국 자기 자존심 세우는 도구로 교회를 이용하려는 습관들은 사라지고, 정직한 영성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왜 서로를 불신하는 영성이 교회에 존재하는가를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답이라면 마귀의 시험과 유혹, 그리고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중 언어로 말하면 교회생활에 대한 질못된 선입견 그림, 그리고 정직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누리는 신앙행활의 연습이 뭔지 몰랐던 오류가 문제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계약과 언약이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형제자매로 묶어 주신 교회안의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대신에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가족이라는 뜻의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계약을 "종이에 쓴 약속"이라면 언약은 "말로 맺은 약속"이라고 설명하고 계약은 불신을 전제로 하니까 눈에 보이는 종이에 쓰지만 언약은 인격에 근거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말로 함을 강조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한 언약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서 연약한 형제자매를 붙잡아 주고, 회복하는 섬김을 계속 연습하는 것을 약속하자고 격려했습니다. 이런 귀중한 "언약""계약"으로 생각하니까, 잘 지내다가도 조금만 자기 맘에 안 맞으면 불신하고, 헤어지고, 원수 삼는 어리석음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는 서로 진실을 나눌 수 있는 성품과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이런 것은 설교 많이 듣는다고 만들어지기 보다 갈등의 관계가 생길 때마다 결단하는 것이고 실천하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무척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정교회가 너무 좋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서 보고할 때 예수님의 언약을 잘 지키다가 왔다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미가사원장 김인기 목사님의 목회칼럼을 옮겨 봅니다. 그런데 이 언약에 대해 약간 어려울 수 있지만 좀 더 설명을 해보자면, 언약(covenant)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양측 사이의 조약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각측이 지켜야 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한쪽이라도 의무를 불이행 할 경우 언약은 파기됩니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으로 계약(조약)이라 함은 양방의 합의하에 체결되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경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라는 성격 때문에 인간의 동의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되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 삼위일체 중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되었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아담은 이 언약을 파기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과 심판이 오게 된 것입니다.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 아담이 실패한 이후로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이행했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들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옛언약(구약)과 새언약(신약) 신구약의 차이는 흔히 알고 있는 예레미야 31:31-33에 대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성구처럼 오해되는 성구도 없습니다. 계약이란 항상 <의무조건과 권리약속조건>이 필요한데, 성경 계시의 특성상 시대 상황마다 필요한 부분이 강조되고 나머지 부분은 기정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이 새 언약에 대한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에스겔 36:26~28절 정도는 같이 읽어야 오해를 덜수 있습니다. 계약서상의 의무 조항의 범주 차원이 겉 사람 차원에서 속 사람 차원까지, 즉 마음에까지 심화확대된 것입니다. 새 계약의 의무 조건인 계명들은 산상수훈과 신약성경에서 보듯이 구약과는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의무조항이 육체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특성으로 인해 하나님은 여전히 육체를 입고 있는 언약 백성을 위해 구약과는 달리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 계약 즉 그 법을 실행할 수 있도록 새 언약을 보증해 주시는 것이 또 다른 신약의 특성입니다. 새 언약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지킬 수 있기에 신약은 구약과 달리 그 백성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명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언약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늘복인 성령님을 꼭 기억합시다.

(36:26-28)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28.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7:7) 7.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13)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

모든 일에 사랑!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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