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동산 칼럼 388호) 2017. 5. 28
친구를 위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절망하며 무너집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무너집니다. 키에르케고르란 철학자는 <죽음의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는 희망에서 시작됩니다. 희망으로 시작되는 믿음은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그 문제를 내놓는 용기를 줍니다. 이러한 희망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요즘 새벽에 어떤 문제를 놓고 계속 기도하는 중에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있던 차에 문득 주마등처럼 성경의 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소개된 한 중풍병자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친구들의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동일한 희망,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위기를 극복해 갑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침상 째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립니다.
주님께 나아가고 싶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워하고 있을 때 지붕을 뜯어내서라도 여러분을 예수님 앞에 세워주고자 하는 친구들, 믿음의 지체들이 있습니까? 지붕을 뜯어내더라도 기필코 예수님께로 데려가겠다는 헌신은 희망이 있는 믿음과 서로를 사랑하는 깊은 관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형제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형제의 소원을 나의 소원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의 가족! 아버지요,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주님의 피로 세워진 나의 영적인 지체들이요, 영적인 부모들이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하고 따뜻해지는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같은 사람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되어 흐르는 사랑입니다. 서로를 자기 생명처럼 귀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위험으로 둘러쌓인 포위망을 뚫고 다가오는 희망이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를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요? 친구요, 형제요, 동역자요, 지체요, 한 몸입니다. 교회가 꿈꾸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런 친구들을 묵상할 때 목자목녀님들, 사랑하는 행복가족들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안에서 우리들을 만나게 하신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친구로 다가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이런 친구가 되었듯이 우리들도 서로 친구로, 사랑하는 동역자로, 지체로, 한 몸을 이루는 관계를 꿈꾸며 살라고 먼저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들, 힘들어도 배고파도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 이런 사랑의 관계로 살아오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달려왔습니다. 넘어지고 깨지고 아파하면서도 이런 관계로 살고 싶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에도 꾹 참고 교회를 말하는 목회자로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사랑하는 일은 여전히 공사 중이라 지체들에게 많은 불편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 형제들, 지체들, 동역자들이 늘 그립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처럼 우리 행복가족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