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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동산 칼럼 323호) 2016. 2. 28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순교가 되어야

 

 

예수 믿고 좋은 것 중에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심한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흔들려도, 추락해서 죽을까봐 무서워지는 대신에 드디어 천국에 가는 모양이다!” 살짝 기대가 스치기도 합니다.

지난주 목요일 한소현 사모의 작은 언니 한주현 사모님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면서 제 입에서는 뜬금없이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감동으로 다가올 때 이런 기도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차피 암, 치매, 노환으로 시달리다가 죽을 거라면, 차라리 주를 위해 순교하는 것이 더 값지지 않은가는 생각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순교가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연세가 높은 분들이 아파서 수술을 받겠다고 하면 살만큼 사셨는데 왜 수술을 받겠다고 하실까?”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수술 받고 싶은 이유는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신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입니다.

영국의 헨리 8세 이후 구교와 신교 간에 있었던 치열한 종교 전쟁을 주제로 하는 영화를 오래전에 한 편 보았습니다. 구교도가 득세하면 신교도가 숙청을 당했고, 신교도가 득세하면 구교도가 숙청을 당했습니다. 또 한 차례의 전쟁이 끝난 후 승리한 쪽 주인공이 패배한 쪽 사람으로부터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하여 고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눈두덩에 주먹 만한 자갈을 얹고 수건으로 눈가리개를 한 후 수건을 조여서, 자백하지 않으면 눈알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고문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내가 이런 고통을 받더라도 순교를 감수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결론은 없다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할 때 웃으면서 돌을 맞았고, 초대 크리스천들이 화형을 당하면서 찬양을 불렀던 것을 보면, 순교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주시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도움이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하실 때 순교를 거부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주님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두렵지만 순종함으로 순교의 자리에 임하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실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저에게 작은 처형이기도 한 한주현 사모님은 저뿐만이 아니라 대학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구에게나 좋은 선배이고 누님이고 신실한 믿음의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한마디 가볍게 던진 말도 쉽게 버리지 않고 담아두는 성격 때문에 아마도 당신 자신에게는 스트레쓰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분의 짧다면 짧은 52세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어쩌면 신앙 때문에 꼭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모진 고문속에서 죽는 것만이 순교가 아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한 교회를 목양하는 사모로, 아내로 평범한 주부로 믿음을 가지고 척박한 현실속에서 영혼구원하여 제자삼고자 몸부림치는 삶속에서 헌신하며 섬기다가 최후를 맞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죽음, 순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반드시 또 다른 제자를 낳습니다. 특히 다문화가정 사역을 오랫동안 해왔던 고인의 섬김과 헌신의 열매는 또다른 다문화 가정의 영혼구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래서 순교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처형이 많이 보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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