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생각의자 753호> 2024. 6. 2.
“모든 책임은 교인에게”
이게 또 무슨 엉뚱한 이야기인가 하시겠지만 제가 목회자가 되기 전에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중요한 결단이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에서 프로그램에 엮여서 일이나 봉사를 잘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적 표현이 저는 불편했습니다. 잘못된 열심 때문에 주위의 형제자매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습니다.
사실 "열심" 그 자체로는 그 "동기"가 (1) 타고난 성격인지, 아니면 주님 향한 진정한 헌신인지, (2) 교회 안에서 자기를 증명하려는 오기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젖은 감사의 표현인지, (3)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뭔가 교회에서라도 인정받으려는 종교적 도피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감격의 표현인지, 자신 스스로도 착각하는 경우도 많고, 그런 열심을 보는 주위 사람들의 분별도 차이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벌써 이런 글을 쓰면서도 양쪽에 속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지나갑니다)
그래서 목회하는 동안 제 마음속에 “모든 책임은 교인에게”라는 구호를 생각하며 “열심”이라는 모습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은혜의 관계에서 믿음의 표현되도록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형제자매들이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에서만 표현되는 "열심"으로 헌신의 삶을 연습하도록 인도할 "모든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목회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증명용 열심과 예수님 증명용 열심이 더 선명하게 분별이 되고, 자기 증명용 열심에 대해서는 아무리 잘해도 제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반응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좀 부족해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열심은 그 열매가 본인과 이웃에게 기쁨이 되도록 도와드리는 모든 책임을 감당해 온 것 같습니다.
“책임”이라는 단어 자체가 뭔가 억지로 해야 하는 것 같은 부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오히려 “책임”이라는 단어 안에는 충성된 태도, 열매가 나타나는 성취감, 일관된 방향성 등 긍정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된 저는 형제자매들이 예수님 안에서 열심을 갖도록 도와드리고 그런 섬김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책임을 감당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심은 이웃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복음으로 설득하고,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연습을 잘 하도록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이 성경 말씀을 전하는 훈련, 세상 돌아가는 현상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분별하는 연습, 이웃을 심방할 때 필요한 말씀 태도 언어 자세 등, 뭔가 주님을 위해 열심을 냈다면 성령님이 다스리시는 즐거움이 열매가 되도록 연습하는 사역에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영접한지 오래 되지 않았거나, 종교생활에 젖은 세월이 오래된 분들에게는 이런 훈련이 어색하겠지만, 목회자의 “책임”은 이런 분들도 자기가 책임질 줄 아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연습하고 변화되는 섬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지만, 좋은 이야기의 내용이 삶 가운데 나타나는 열매를 체험하고 간증하는 것이야말로 큰 복입니다. 가정교회는 이런 복을 자신의 삶의 증거로 표현할 수 있다는 특권이 너무 감사합니다. 형제자매님들이 모든 신앙생활의 책임을 즐겁게 감당하도록, 목회의 책임을 감당하는 모든 목회자와 목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번 봄부흥회 강사로 오신 김종욱 장로님이 섬기시는 올랜도 비전교회의 원로목사이시며 북미가사원장으로 섬기시는 제가 좋아하는 김인기 목사님의 최근 칼럼입니다. 이번 120차 목회자 컨퍼런스에서도 최영기 목사님을 통해 도전되었던 내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증명용 열심>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국 자신의 삶속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증명용 열심>도 자신의 인격속에서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담임목사의 리더쉽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의 배신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복음서를 보면 몇 번의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택은 가룟 유다가 했으니까요. 담임목사의 리더쉽을 운운하는 것은 이런 차원이 아니라 담임목사 자신이 얼마나 어떻게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지도자로서 살았는지에 대한 반성이며 끊임없는 고민 때문입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김인기 목사님의 칼럼이나 최영기 목사님의 일침은 바로 담임목사 스스로가 직업(?)이 아닌 사역자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른 목사다운 삶에 대한 외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벌써 올해로 목사로 장립된 지 25년이 됩니다. 여러 교회를 섬기면서 그리고 신학대학원 교수님들과 선배 목회자들께 보고 배우면서 목사로 사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죄의 유혹에 빠지고 타성화되면서 목사의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목사의 삶은 모든 예수영접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예수님 닮은 삶이어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기준이 될 수 없으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드렸던 바울의 고백이 다시금 제 마음과 허리를 동이게 합니다. (사도행전 20:24)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을,
모든 일에 사랑을!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