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생각의자 746호> 2024. 4. 14.
“원인 현상 방향 소통”
오래 전에 우리 교회 목회서신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설교가 맘에 안드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영적으로 메말라 있거나 종교 생활에 굳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알리고 성도들의 마음에 영적인 분별력을 기르려는 훈련의 방향을 늘 제시했습니다. 영적으로 메말라 있다는 의미는 사람 관계, 언어 표현, 섬김의 태도를 들여다 볼 때 뭔가 비판적이고, 부정적 부분을 잘 드러내며, 뭔가 억울한 마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문제는 본인이 이런 분위기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분위기의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지 살펴보는 기준을 목장과 교회 사역의 여러가지 예를 들어 자주 알려 왔습니다. 종교생활에 굳었다는 의미도 자신이 경험한 교단의 법, 감투화된 직분을 빙자한 지배의 욕망, 자기만이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신비한 영적 체험, 본인의 인생에 반복해서 경험하는 리더쉽과의 갈등, 사회적 도피에 가까운 열정적 교회 봉사, 나름대로의 기준을 종교적 의미를 붙여 맞다, 틀리다로 편가르는 영성,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본인이 잘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메말라 있거나 종교생활에 굳어져 가면 아무리 가정교회라는 이름과 모습을 가졌어도 가정교회를 잘 세우기 위해 아름답게 만들어진 원칙을 빙자하며, 목자 목녀라는 영광스런 사역을 잘한다 못한다로 비교하거나, 원칙에 맞다 틀리다로 편을 가르거나, 내가 경험했던 교회에서는 목장을 이렇게 했는데 우리 교회는 저렇게 하느냐 등의 부정적인,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표현하는 현상을 종종 보아 왔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의 경우 모든 모임을 기도회로 바꾸고, 기도 길게, 말씀 길게 설교하고, 찬양 길게하면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이나 종교생활에 굳은 사람은 점점 이런 기도회 모임을 비판하고 싫어하며 싫어하는 듯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모으기에 열심을 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영적으로 변질된 현상이라는 것을 실제 삶의 태도와 관계와 언어를 예로 들어 자신도 알고 남도 알게 했습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영적인 점검을 해 볼 줄 아는 분별과 성찰이 가능하도록 기준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소위 "문제"라고 자주 등장하는 "메뉴들"을 미리, 그리고 자주 그 문제의 원인을 드러내고, 그런 문제는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어떤 현상으로 드러나며, 그런 현상을 보았을때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하는지 제시하는 방법으로 소통해 왔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것 처럼 "설교가 마음에 안든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사실 설교의 내용 자체보다, 설교와는 거의 관계없는, 설교자에 대한 "관계의 불편함"을 표현하는 메뉴라는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저에게 설교의 부족을 이야기하는 분에게는 김목사를 그냥 좋아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관계가 회복되면 설교는 은혜롭게 되어 있습니다. 좋아할 수 있어야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항의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좋아할 만해서 좋아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사랑때문에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처럼, 김목사도 좋아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좋아해 달라는 것이라고 간곡하게 소통했습니다. 다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 저와의 불편한 관계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기 시작하고 관계를 회복하려고 피차에 기도하면서 회복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누구 한 사람을 지적하는 설교다" 같은 메뉴 또한 자주 나오는데, 성경 말씀은 어차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지적하는 느낌으로 들려야 정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지적을 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성령의 역사가 있거든 즉시 회개하고 다시 그런 말씀의 지적을 당하는 것 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설교자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결단하고 오히려 격려하고 사랑하는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동시에 목회자의 설교가 누구 한사람을 지적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 설교자와의 관계에 뭔가 얼그러져 있다는 증거임으로 그 관계를 회복하고 그 설교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도록 기도하고 섬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차피 얼그러진 세상 속에서 교회 목회자를 향한 기대는 엄청납니다. 추상적으로 막연한 이야기로는 훌륭한 목사, 설교 잘하는 목사를 만나기 원하고, 어떤 분은 24시간 심방하는 목사, 어떤 분은 영어 잘하는 목사, 어떤 분은 자녀들 잘 키워주는 목사, 어떤 분은 학위나 학력을 따지고, 어떤 분은 외모까지 멋있는 모습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공동체는 그런 훌륭한 목사를 찾아서 고용하는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 부족한 목회자를 잘 섬겨서, 특히 자신이 보기에 한심한 목회자라면 원망하거나 지적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종교인이 되기보다 똑같은 조건, 즉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한심한 목회자이기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목회자의 부족함을 채우라고 만나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근거를 두고 섬기자고 소통했습니다.
실제로 그리고 자주 김목사의 부족함이 보이고 맘에 안드는 행동, 언어가 있을 때, 오히려 그 부족함을 채워 주고 도와주는 성도, 공동체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피차에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성도들은 김목사의 부족함을 채우느라 수고한 희생과 섬김에 대한 상급을 받고, 김목사도 그런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즐겼던 상급을 받도록 하자고 소통했습니다. 왜냐하면 변질된 교회일수록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지 그 열매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일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신도 때는 물론이고 전도사, 부목사 때 교회 "일"은 많이 했지만 정작 목회자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별로 훈련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세례식이나 결혼 주례를 해보지 못하고 담임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덕분에 더욱 영혼으로 드리는 예배와 예식을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목회적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교회 공동체가 제 부족함을 지적하거나 원망하기보다 격려해 주고 채워 주고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는 영성으로 김목사와 가정교회를 세워 온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시중에 수많은 교회는 누가 잘한다 못한다 평가만 할뿐이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거나 희생으로 도우려는 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김목사가, 전도사님이, 목자 목녀님이 맘에 안 드십니까? 사실은 맘에 안드는 그 부분을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은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비도 주시고 등록금도 내 주시고 세미나도 보내셔서 맘에 들게 만드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넘칩니다. 그것이 영적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해 보고 이야기 합시다"
사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목회자와 섬기는 공동체 간에 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는다는 교회들마다 늘 반복해서 나오는 원망과 지적의 메뉴들을, 관계가 좋을 때 미리 드러내고, 문제의 원인도 드러내고 그 문제의 원인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소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자신을 드려내려는 인간의 죄성이 종교적 이름으로 포장되어 교회 분쟁이나 갈등을 만드는 중심에 늘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자신이 옳다는 것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그 영혼을 지배하게 되면 예수님의 사랑이나 용서가 다 종교적 추상적 좋은 말로 전락해 버리고 편가르기와 분노와 원망으로 얼그러지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기쁨의 열매는 이런 사랑의 소통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를 통해 문제의 원인과 현상을 분별하는 지혜, 해결의 방향을 배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가정교회 북미가사원장 김인기 목사님의 최근 칼럼입니다. 저는 이 칼럼을 두세번 반복하며 읽으면서 <원인 현상 방향 소통>가운데 어느 부분에서 막혀있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사건과 관계를 대하는 담목인 저의 자세였습니다. 아무리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전달하려고 해도 아비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그것은 소위 옮은 개소리(?)가 되듯이 때때로 담임목사로서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불신이 느껴질 때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아마도 제 안에 있는 어떤 인정욕구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교우들에게 언제나 존경받고 신뢰받는 담임목사이면 좋겠지만 우선적으로는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려고 했는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할수만 있으면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주님은 언제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내 감정과 생각이 앞서게 되면 우선은 제 자신이 불편해 지고 그 마음이 얼굴에 금방 나타나기 에 은혜가 안되고 공동체에 덕을 끼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만 편하면 된다거나 난 이렇게 이미 응답을 받았기에.. >라는 이것만을 고집할 수 없는게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에 생각대로 소통이 잘 되지 않아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보아주려고 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주님이 인도해 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이기에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자동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막히게 됩니다. 그러면 주일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연합교회 섬김도 은혜가 되지 않으며, 목장에 가도 마음이 건조해지고 예민해져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영혼이 병들거나 시험이 들기가 쉬워집니다. 성령님과 말씀에 따라 하나님과 교회앞에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며 지어먹은 마음이 아닌 순종하는 자세를 주안에서 갖게 되면 소통은 회복되고 비뚤어진 마음은 치유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복을 여는 천국시민임을 꼭 기억해 주세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을,
모든 일에 사랑을!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