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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9 00:36

(743호) "풍성한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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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생각의자 743> 2024. 3. 24.

 

풍성한 절제

 

 

갈라디아서 522-23절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 아홉 개 단어는 한 사람의 영혼이 성령님의 지배를 받을 때 그 개인의 내적 또는 외적으로 성령님이 나를 다스려주시는구나를 경험하는 체험이기도 하지만, 사실 가정교회를 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성령의 열매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관계의 열매라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아홉개 열매 중에 마지막 단어로 기록된 절제(Self Control/ Temperance)”는 섬김의 자세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성령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절제는 무엇을 안 하는 것만 아니라 할 것을 할 줄 아는 것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해야 할 것을 하면 안 해야 할 것을 저절로 안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절제의 감각도 가난하기 때문에 인색한 사람이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더 풍성한 사람이 있습니다. 많이 소유했음에도 움켜쥐고 인색한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넉넉하지도 않은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풍성한 나눔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의 삶에 항상 넉넉한 소유를 가지되, 나눔에 있어서는 더 큰 넉넉함으로 하나님의 손길로 사용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의 가시적 나타남에 있어서, 숫자로 표현되는 재산의 크기와, 성령의 열매로 표현되는 풍성함과는 아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목회 현장에서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형편에 따라 좌우되기보다 의미와 목적을 결정하는영성(성령의 다스림)”에 따라 피곤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 고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생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교회의 영성은 고생을 즐기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만 경험적으로 간증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로 나타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평신도 세미나나 목회자 세미나를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도 늘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절제의 열매들을 보아 왔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하시는 분들에게 민박을 제공하고 참석자들이 참관하게 될 목장을 배정하다 보면 늘 복잡한 상황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복잡함이 오히려 절제의 실력을 다듬고, 절제하는 영적 성숙함을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지난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고 방송마다, 사람마다, 전염병 피로감(Pandemicfatigue)이란 말을 하며, 안 하고 못 하고 도망가야 할 기회를 찾는 핑계를 댈 때, 가정교회 공동체들은 오히려 고난의 시간을 도전의 기회로 삼고 믿음의 발돋음을 시도하는 기간으로 삼는 절제의 열매를 보았기에 감사가 넘쳤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관점에서 큰 그림도 가져야 하겠지만, 심판으로 달려가는 세상 흐름 가운데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사역에 지장 받지 않는 넉넉함을 표현할 줄 아는 절제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목장 식구와 VIP를 잘 섬기겠다고 형편과 처지를 바꾸어 가며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연습이야말로 믿음으로만 설명이 되는 절제의 열매들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황에 따라 살기보다, 상황을 극복하고 한걸음 더 내딛는 믿음의 발걸음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삶의 현장에 있더라도 신앙의 발돋음을 내딛는 일에 지혜로운 절제를 잘 적용하여, 할 것은 담대하게, 안 할 것은 단호하게 결정하여 삶 가운데 풍성한 절제를 즐기는 가정교회 공동체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모시기를 원하여 기도하고 있는 북미 가사원장으로 미국 올랜도 비전교회의 김인기 원로목사님의 최근 칼럼입니다. 칼럼을 읽고 나서 그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헬라어 원문에 보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나오는데, 그것은 결국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하나라는 뜻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이신 예수님의 성품이요 인격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순서로 따지면 왜 처음이 사랑이고 맨 마지막이 절제일까? 사랑과 절제는 어떤 상관성이 있을까? 사랑(아가페)이 조건없이,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절제는 할 것은 담대하게 하고, 안 할 것은 단호하게 결정하여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때에 결국 진정한 사랑은 풍성한 절제로 열매맺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본보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 특히 마지막 한주간을 보내시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모습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교회의 머리요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현실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거나 한쪽으로 기울거나 아니면 자신과 관련된 아니 직간접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도무지 머리요 주인되신 주님의 뜻을 찾거나 헤아리지도 못하고 조급하며 기다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과 절제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담목인 제 자신부터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모든 동기와 과정과 결과를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 흠이 없도록 우리가 우리 가정과 목장, 교회와 일터의 삶을 진실함과 낮아짐으로 고백하고 뜻과 소원을 묻는 과정을 통해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기대하며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겸손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잠언 13:2-3) “2. 선한 사람은 열매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지만, 반역자는 폭행을 당할 뿐이다. 3.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아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

모든 일에 사랑!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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