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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생각의자 477> 2019. 2. 10

 

나의 영원한 멘토

 

제 장인어른 되시는 한대희(韓大熙) 목사님은 전주여자고등학교 앞에 있는 전주침례교회를 40여년간 목회하시고 19년전에 은퇴하신 뒤에 원로목사로 계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침례교가 그렇게 큰 교단은 아니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감리교 다음가는 매우 큰 교단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말부터 전주침례교회로 옮겨 출석하던 때에는 담임목사님으로 재직하고 계셨기에 저에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어려운 분이셨습니다. 심지어 저는 어린마음에 목사님은 화장실도 안가시고 진짜 새벽이슬만 드시는 분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교회 권사님들이 목사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것이라고 하셔서 정말 그렇게 예수님 다음으로 존귀하고 존경해야 하는 분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감히 목사님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겸상을 한다는 것은 제 인생에 언감생심 꿈도 꿀수 없다고 생각을 하였고, 40년전 당시에는 교회가 직사각형으로 된 큰 교회였기에 더더욱 예배시간을 제외하고 목사님을 뵐수 있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제가 대학부 2학년까지 그 교회에 출석을 하고, 다니던 지방대학교를 자퇴하고 신학대학교에 진학한다고 말씀 드렸을때에 목사님은 저에게 선뜻 <왜 나는 신학대학에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주일 저녁예배에 간증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고, 교회에서 파송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모든 교우들과 함께 중보하며 축복해 주셨던 일은 제 평생에 잊지 못할 파격적인 기억으로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주침례교회에 부임하실 1950년대말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후 정말 힘들게 살았던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개척교회나 다름이 없는 어려운 교회에 부임하여 생계를 위한 요즘말로 알바도 없이 전도만하면서 생활을 꾸린다라고 하는 것은 고스란히 당시 태어났던 세자녀들에게는 소위 목회하는 아버지로 인해 가난과 함께 생고생을 벗하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함께 신학교를 졸업했던 친구들은 사람은 모름지기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상경해서 도심에 개척을 할때에 아버님은 그래도 당신은 당신 고향과 가까운 교회가 없는 지방으로 가야한다는 소명감으로 그렇게 전주에 개척아닌 개척교회를 감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 지금도 전주에서는 가장 큰 침례교회를 남겨두고 은퇴하게 되신 것입니다.

 

제가 다녔을 당시에 저의 집안에서는 저밖에 교회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영산영월 신씨 34대손 종가집 장손으로는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그 후로 두 남동생을 전도하여 함께 청소년시절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별 볼 일 없었던 무명의 제가 그렇게 다녔던 교회의 담임목사님 셋째딸과 결혼을 하다니요^^ 1년에 한두번 전주에 가서 장인어른을 뵐때마다 저는 가끔 내가 꿈을 꾸고 있나 하는 생각을 오랜시간동안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저희 부부가 결혼한지도 벌써 28년이 되어가는 동안 은퇴이후 해마다 늙어가시는 모습을 뵈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특히 이번에 쓰러지셔서 예수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경유하여 지금은 전주에 있는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는데 많은 분들의 기도로 도움기구를 통해 아직도 온전치 못하게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보면서 서울에서 목회해서 대형교회를 이루었던 친구 목사님들 보다는 작은 규모의 교회일지언정 언제나 당당하시고 은퇴직전까지 젊은 목회자 못지않게 패기와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셨던 장인어른을 기억합니다. 몇 년 전에 혹시라도 저에게 기회가 없을까봐 아버님을 저희 교회에 초청을 해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드렸었는데 정말 교회가 가족같고 막내 사위가 목회가 잘 하고 있다면서 얼마나 좋아하셨던지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도 얼른 나으셔서 다시 저희 교회에 오셔서 좋은 말씀 해주시라고 부탁과 당부를 드렸는데 그래야지 그래야지 말씀하시면서도 웬지 예전 같지 않으시게 힘이 없으신 목소리에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가정교회 사역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저희 장인어른의 영향이 아닌간 생각합니다. 가정교회 운동의 핵심은 신약 교회를 회복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일반대학교 들어간 후에 시국도 시국이었지만 그렇게 방황하면서 교회와 잠시 멀어졌다가 당시 교회 대학부에 부임하신 전도사님을 통해 제자훈련을 받게 되었고 결국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는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당연히 제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된 후에도 성경은 당연히 제 목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성경에는 교회는 이래야 된다고 하는데 왜 교회는 안 그런가?” “성경에서 목회는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안 하는가?”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목회를 하고, 성경적인 성도를 만들어내어,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보자고 가정교회를 만나기 이전부터 평생 이러한 성경대로라는 말씀을 고집처럼 강조하셨던 장인어른의 목회철학을 보고 배운 것이 결국은 가정교회를 만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머리에 그리는 이상적인 지도자 상은 침몰하는 배의 함장입니다. 배가 침몰할 때 선원들을 다 대피시키고 장열하게 배와 더불어 함몰하는 함장의 모습입니다. 이런 지도자의 상도 한 교회를 4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꼿꼿하게 섬기시던 장인어른의 모습에서 떠올렸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도 언제나 내려가서 뵈면 제가 식사를 꼭 대접해 드리는데 그때마다 반복해서 하시는 기도는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교회된 성도들을 위하여, 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종의 가정>이 되기를 축복해 주십니다.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와 더불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셨던 장인어른 한대희 목사님은 그래서 저에게 지금도 영원한 멘토가 되고 계십니다.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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