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생각의자 738호> 2024. 2. 18.
“담임목사를 수용하는 성도되세요”
미국의 한 작은 도시에 작은 교회당을 소유한 한인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담임 목회자가2-4년마다 바뀝니다. 처음 담임 목회자가 부임했을 때는 잠시 좋아하다가, 얼마 후부터는 불평하기 시작하고 압박감을 주어 목회자를 떠나게 만듭니다.
이 교회 교인들의 담임 목사에 대한 기대치는 대단합니다. 능력은 조용기 목사님 같고, 인격은 한경직 목사님 같고, 설교는 이동원 목사님처럼 잘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담임목사로 오셔도, 학벌이 시원치 않다, 세속적이다, 강단에서 교인을 깐다 등등 트집을 잡아 쫓아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 교인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몰라서 이럽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완벽한 목회자가 있다면, 왜 이런 좋은 분이 이런 시골, 이런 작은 교회에 담임 목회자로 오시겠습니까?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것은 이 교인들만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는 그 교회에 합당한 담임 목회자를 보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분수를 모르고 만족치를 못합니다. 교회 건물이 크다거나, 교인 숫자가 많다거나, 재정이 풍부하다는 등의 자부심으로 담임 목사님을 고용인처럼 생각하고, 목사님의 부족한 점을 꼬집고, 목사님을 배척해서, 마침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교회도 많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목사는 없습니다. 설교를 잘하면 행정력이 약하고, 친화력이 좋으면 추진력이 약하고, 박력이 있으면 고집이 세고… 모든 목사는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불완전한 담임 목사님을 수용해야 합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담임 목사님을 수용하지 않으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계속 교회가 분열되고, 담임 목사님이 떠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완전한 목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담임 목회자가 모든 교인들의 기대와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교인들의 기대와 취향은 다양할 뿐 아니라 서로 상치되기까지 합니다. 한 사람의 목사가 많은 교인들 비위를 맞출 수는 없는 일이고, 교인들이 담임 목회자에게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부족하게 느껴지는 목사를 수용하고자 할 때에 교인 자신이 아름답게 변합니다. 순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순종하고, 존경할 마음이 없는 사람을 존경하려 할 때에, 겸손해지고, 관대해지고, 인내하게 되며, 결국 예수님을 닮아 가게 됩니다.
불완전한 70점짜리 목사라도, 교인들이 장점과 강점을 키워주면 80점, 90점짜리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단점과 약점을 꼬집고 헐뜯으면 60점짜리, 50점짜리 목사로 전락하고 맙니다.
모실 때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일단 담임목사로 모셨으면 그 분의 독특한 면을 받아드리고, 그 분의 진심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고 또한 약점을 커버해드려야 합니다. 그분을 수용하고, 그분을 좋아해야 합니다.
제가 휴스턴 서울 교회에서 20년간 담임 목회를 잘 마치고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님들이 제 단점과 약점은 커버해 주고, 제 장점과 강점이 부상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부사항을 기억하지 못하는 약점을, 사무장을 비롯한 행정 사역자들이 커버해 주었습니다. 제가 쌀쌀하게 대해도, 섭섭해 하기보다는 교인을 편애하지 않는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이랬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실 때 간절히 구하신 것 중의 하나가 제자들이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요17:21-23).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담임 목사와 교인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오해하고 미워해서 싸우고 분열하는 교회에서 전도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치 못한 담임 목사님이지만 주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알고 존중히 여기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예쁘게 보셔서 다음에는 이분보다 훨씬 더 좋은 목사님을 보내주실지 모릅니다.
(2013년도에 가사원장으로 섬기셨던 최영기 목사님의 칼럼입니다. 이 칼럼을 읽으면서 제가 많이 부족하고 완전치 못한 목사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나름 지금까지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어쩌면 나의 기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목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 살고 치열하게 말씀과 성령님 앞에 날마다 자신을 객관화했는가?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옆으로 기면서 옆으로 기는 자기 자식에게 똑바로 걸으라고 말하는 게가 바로 제 자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거꾸로 교인들의 장점과 강점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 불완전한 50점짜리 목사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모든 교인들을 만족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비전가운데 주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살아가도록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들 속에서도 주님이 보여주시고 인도해주신 신약교회 회복이라는 성경적 교회관에 대해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평신도 지도자들과 교우들이 동의하고 함께 마음을 모아준 결과라고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오히려 험악한 세월을 보낸 시간들을 거름삼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데 집중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3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복음, 주권, 통치, 다스리심)와 하나님의 의(뜻, 소원, 관계, 거룩함)를 구하면 교회 재정도, 교회 이전, 다음세대 사역도 개인의 건강, 가족, 관계, 사업 등등을 포함한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결국 1세기 신약교회가 세축을 붙잡고 영혼구원과 제자양육이 주일예배, 삶공부로 말미암아 가정에서 모이는 목장교회를 통해 나타났던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강조하는 목장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주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아닌 손가락에 집중하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한 성령안에서 하나됨을 잊지않고 진정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아 목적이 이끄는 신앙인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을,
모든 일에 사랑을!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