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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동산 칼럼 397호) 2017. 7. 30

 

 

편한 것만 추구하면 우리의 영성은 죽습니다

 

(가사원장 최영기 목사님의 칼럼을 옮겨 봅니다)

 

여행을 자주하던 작년 언젠가 한국에 갔을 때 꽤 잘 알려진 두 교회를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두 교회 모두 담임목사님들의 인격이 훌륭하고 설교도 좋다고 알려진 교회였고, 두 교회가 다 어느 정도 부유한 곳에 있는, 사이즈가 어느 정도 되는, 바깥으로부터 좋은 교회라고 평가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교회는 같이 참여해 드려본 예배가 실망스러웠습니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예배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성도들의 예배드리는 태도 역시 다들 적극성이 없이 관심 없는 외인 같은 모습이어서 약간은 충격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얼마 후에 방문한 또 하나의 교회는 뭔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설 때부터 가벼운 긴장감이 있었고, 예배 시간에 거의 예외 없이 설교에 집중하고 반응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왜 그럴까? 두 분 목사님이 다 훌륭한 분들이고, 설교도 비슷하게 좋으시고. 교회의 사이즈도 둘 다 중형 이상인데 과연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궁금했습니다.

 

그 차이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큰 이유 중 하나는 편안함의 안주와 불편함에 따른 헌신의 차이였습니다. 첫 번째 교회는 잘 안정되어, 좋은 프로그램에, 잘 정돈된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는 불편함이 없는 교회인데 반해, 두 번째 교회는 많은 부분이 불편한 교회였습니다. 본당이 좁아서 체육관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몇 백 개의 의자를 성도님들이 놓아야 하고, 주차장도 없어서 멀리 학교 운동장까지 걸어가고, 차가 다 빠지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교육관은 형편없이 좁은 등 여러 가지가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 다니는 헌신 때문에 교인들이 살아있고, 예배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크리스천은 불편한 점이 사라지고 편안함에 안주하면 영성도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불편함을 못 견디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까? 조금만 편리한 기기가 나오면 바꾸어 쓰고, 조금만 편리한 시설이 있으면 도입하고, 우리는 끝없이 우리 자신을 편하게 만들어 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작고 재정이 가난할 때는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다가 사이즈가 커지고 재정이 좋아지면 화려한 건물을 짓고, 넓은 친교실을 만들고, 불편함이 없는 주차장을 만들고, 시스템도 더 편하게 고쳐나가고, 그래서 교회는 갈수록 정말 흠잡을 데 없는 곳이 되어가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영성은 죽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는 아직은 불편한 부분이 많은 교회입니다. 친교실도 좁고, 주차장도 부족하고, 시설도 미비한 부분이 많습니다. 잉여자산이 있으니 고쳐볼까 싶지만 그런 이유에서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 우리교회는 시설뿐 아니라 정책에서도 성도들을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 많은 교회지요. 그런 의미에서 리더십이 교체되고 나면 그동안 불편했던 점을 바꾸자고 건의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담임목사가 바뀌어도 꼭 필요한 불편함은 계속 고수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성이 살아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발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 우리 행복을여는교회의 지체들이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 및 교회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준비된 후반기의 모든 교회사역(일정)들이 또 하나의 일(행사)이 아닌 각자에게 예비된 하늘의 은혜가 전문사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가운데 즐겁고 행복한 천국잔치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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