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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여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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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동산 칼럼 368호) 2017. 1. 8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제가 우리 행복을 여는 교회에 부임한지 올해 11년차가 되었습니다. 앞만 보고 와서 그런지 어떻게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쁜 일도 있었고, 마음이 무겁고 답답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다양한 분들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그 만남이 지금도 계속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한때 좋든 싫든 기억 속에 남겨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기쁜 생각과 더불어 웬일인지 서운한 감정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현재 여기까지 우리 행복가족들과 함께 하는 지금은 생각할수록 어떤 때보다도 행복하고, 지난 30년간 우리교회를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로 동행해 준 교우들의 믿음(저는 개인적으로 믿음을 의리라고 생각합니다)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기도할때마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나온 시간속에서 부족하고 미령한 담임목사를 끝까지 신뢰해 주고 믿고 따라와 준 성도들이 계셨기에, 저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가운데 이를 악물고 기도하며 버틸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험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사안이 크고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저는 다소 조급해 지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목회 리더쉽에 대해 저항이 느껴지거나, 선택과 위임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는 생각이 들면, 추구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원점부터 다시 점검해 보고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반복적으로 갖게 되는데, 그러나 마음 한켠에 남겨진 감정적인 안정은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회의를 하다가 그런 일이 생겼을 때에도, 당시 순간은 답답함과 자괴감으로 서운한 마음이 앞섰지만, 성령님은 시간이 흐르면서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제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셨고, 그렇게 회의장을 나가버린 분의 심정도 어느정도는 헤아릴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통큰 대인배라면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니까 얘기하다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대화의 자리도 아니고 공회 석상에서의 그런 행동은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매우 불편함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표현방식의 차이가 있고, 관점의 차이가 있기에 그리고 우리 행복을 여는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고, 누구보다도 우리 목자목녀들이 온전히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일하다고 믿기에 그래서 우리 공동체내에 이런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주간 긴 시간을 잡아 기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드디어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제가 기대한 것과 달랐습니다. 상한 자존감이나 분노심을 없애주시는 대신, 제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였습니다. 제 자아와 이기심이 문제였습니다.

 

제가 행복을 여는 교회를 사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보면 내 교회였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우리 교회가 번듯하게 세워지기를 바랐습니다. 제 개인적인 교회관 가운데 하나도(예수님 승천이후 4세기동안 교회건물을 갖지 않았던 초대교회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필요와 소원이 그러하시다면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결단을 한 마당에 주님의 교회를 위하는 일이하면 기꺼이 내 한 몸을 바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동기를 살피면 내가 동의하고 부임한 교회였기 때문에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제 목회의 핵심에는 항상 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사역의 핵심에는 언제나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게 하셨습니다.

 

영혼 구원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열심히 전도하지만, 남을 설득해서 믿게 만드는 보람, 깨어진 삶을 회복시켜 주는 성취감이 없어도 과연 그렇게 열심히 할까? 아닐 것입니다. 궁극적인 동기는 내 보람’, ‘내 성취감이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 운동도 그렇습니다. 전심을 다해 일하고 있지만, 만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신약 교회 회복을 주도하고 내가 돕는 위치에 있어도 내가 지금처럼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었을까? 필시 아닐 것입니다. ‘내 사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몸 바쳐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사역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만족, 자신의 보람, 자신의 성취감이 깔려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삶과 사역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떨쳐버릴 수 없는 이기심은 저로 하여금 절망감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한 말이 제 고백이 되었습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7:24)”

 

가정교회의 핵심 가치가 섬김과 기도의 삶이고, 가정교회 리더십의 핵심은 종이 되는 것이라면(진정한 종이 되면 소통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만족과 이웃의 칭찬을 위해 일하고 있는 내가, 과연 가정교회 사역을 계속해도 되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담임 목사직에서도 사임해야하는 것 아닐까?

 

이때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육성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려주셨습니다.) “규갑아, 나는 네가 이기적인 동기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단다.” 이 음성은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 이상의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지금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용하셨고, 저를 통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즉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7:25; 8:2).”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독수리는 밑으로 잡아끄는 중력의 힘에도 불구하고 유유자적 하늘을 납니다. 중력의 힘을 극복케 하는 날개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날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저는 전에도 이기적이고, 지금도 이기적이고, 앞으로도 이기적일 것입니다. 그것이 때때로 소통을 방해할 것이고 관계적인 어려움을 줄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동기와 목적은 이기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역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기적인 인간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기심을 치유될 수 없는 만성질병 정도로 생각하고, 겸손하게, 아주 겸손하게 (저는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라기보다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들은 음성에 순종하려고 애쓰고, 성도들과 함께, 특히 교회 지도자들과 최선을 다해 대화하고 소통하며 동역자로 세워가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저의 이기심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시면서도 저를 통해 일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이런 깨달음 가운데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우리는 함께 의견을 나누며 소통하는 시간 속에서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잘못을 시인하고 서로의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용서와 사랑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목자의 목자인 담임목사로서, 또한 한 목장의 지도자인 목자로서 우리 행복가족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리고 본이 되지 못한 점을 진정 같은 마음으로 사과드리며, 주안에서 한 가족된 우리 모두가 동반성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세워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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