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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생각의자 591호> 2021. 4. 18

 

신학적인 문제로 반론이 일 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선교지에 가서 현지 목사님들의 수련회에 주강사로

참석해서 여러 가지 강의와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현지 목회자들이 200명가량 참석했고,

선교사님들도 20여명 정도 참석한 자리였는데 마지막 헌신과 결단의 시간에 천국의 소망에 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천국은 모든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에 이생에서는 저와 제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는 정말 좋은 아버지로, 좋은 아들로 다시 시작해 볼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인도하던 저도 울고, 통역하는 분도 울고, 다들 은혜롭게 재헌신을 하고 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급히 나오는데 뒤에 앉아있던 한 선교사님이 저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제가 천국을 잘못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제자들 앞에서 잘못 가르쳤으니 그냥 보낼 수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분은 얘기는 천국에서는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고 천사처럼 있다는 마태복음 22:30절에 근거해서 제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천국에서 관계가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6:28절처럼 말이지요.

저는 성경의 한 구절을 가지고 결정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고, 성경을 전반적으로 보고 판단할 일이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말리면서 떼어놓는 선교사님들 덕분에 가까스로 공항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얼핏 듣기에 그 분은 특별히 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본인의 생각과 다른 얘기를 하니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신학은 이렇게 때로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신학적인 논쟁은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상 계속되어 왔던 일이니까 놀라울 일도 아니고, 그 이유가 성경이 그런 부분에서 정확한 얘기를 하지 않고 있거나, 또는 이곳저곳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반론들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잡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는 구절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구절에서는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을 잃지 않을 것처럼 얘기합니다. 로마서 8:38-39절을 포함해서 수많은 구절들이 이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또 다른 구절에서는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5-6절을 포함해서, 많은 신약의 경고의 메시지들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신학자들을 포함한 양측의 진영은 서로 한 쪽의 입장을 취한 후에, 반대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은 애써 무시하거나, 아니면 무리한 해석을 통해서 그 구절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해서 그 구절이 본인들의 주장과 상반되지 않도록 해석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고 그것은 우리가 가진 교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럴 때, 우리가 적용하는 해석학의 원리가 있습니다. 한 두 문장보다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과 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 성경 장르에 대한 이해 안에서 구절을 받아들이라는 것, 단순한 구절에서 복잡한 구절을 해석하라는 것, 신약적 사고를 바탕으로 구약을 해석하라는 것 등등 입니다. 이런 원리로 최선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모순된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3차원의 세상이라면 (시간을 포함해서 4차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영적인 세상은 우리의 차원을 넘어서 버립니다. 특히 구원의 문제처럼 이 세상을 넘어서는 사실을 다룬다면 그것은 10차원이 될 지 20차원이 될 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곳은 존재 양식과 물리 구조가 다르고, 그에 따른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언어를 가지고 그 곳을 설명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단편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면 그 단편 단편이 서로 상충되게 들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구원에 대해서는 모순되는 얘기를 하시지만 본인 스스로 전혀 모순된다고 느끼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부분은 경고의 말씀으로,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부분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 앞에서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학을 전공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한들 어떻게 천국을 알며, 어떻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모든 부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의 바다의 한 구석 해변에서 찰싹거리는 파도를 대하고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최선으로 공부하고 지혜를 구하되 마지막은 알 수 없다라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럴 때 더욱 더 천국이 기대가 됩니다. 그 곳은 내가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의문들이 풀리는 곳이 될테니 말입니다. (국제가사원장이신 이수관 목사님의 칼럼을 옮겨 봅니다)

 

자연스런 영성 생활화된 헌신 +shalom 신규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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