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차 세이레 세겹줄특새 및 장례 간증
(2 방글라데시목장) 김기옥 집사, 2018.12.25.
할렐루야~! 주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이 자리에 서게 하심을 감사드리며 저는 2교회 방글라데시 목장을 섬기고 있는 김기옥집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50차 새이레 세겹줄 특새와 친정오빠의 장례식 과정에 부어주신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연약한 저를 세겹줄로 단단히 묶여 기도하도록 주님께서 손경순목녀님과 권정란자매님을 매칭해 주셨습니다.
특새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발견하고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 수 있는 은혜와 성령충만함을 부어주셨습니다.
늘 시간에 쫒기는 일상이지만 추수감사주일을 기점으로 가을부흥회와 특새가 잘 맞물려 주님의 하실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때 보다 컸습니다.
제 기억으로 이번 세겹줄 특새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뜨겁기는 처음이지 싶습니다.
가을부흥회를 통해 작은 것에도 순종해야겠다는 결단이 특새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두드림교회 어린이 목자님들이 선두가 되었고 특별히 맨 앞자리에 눈동자가 한번도 흐트림 없이 목사님 말씀에 집중하는 김예은목자는 눈에서 레이저 불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작은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잠자는 나의 영혼을 깨우게 하시니 도전과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3주차 기도제목은 [남편 김광억집사님이 마지막주 특새를 결단했는데 환경이 어떠할 찌라도 승리하길] 이었습니다. [환경이 어떠할 찌라도] 이 문구가 제 맘에 크게 꽂혔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복선이 깔리는 묘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세겹줄 기도가 힘이 되었습니다.
3주차 첫날 월요일 새벽예배중 제 귀에 여름 장대비 내리는 듯한 큰 빗소리가 한참 들렸습니다.
같은 시각 둘째 오빠가 집 앞에서 시멘트 블록에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오전 10시경 경찰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119에 후송되어 뇌출혈이 심각한 상황에 수술을 받고 경찰이 직계 가족인 딸의 주소지로 찾아갔으나 무연고 상태였으며 어머니는 저희 집 주소로 계셔서 남편이 집에 잠깐 있는 시간에 경찰이 찾아와 극적으로 병원과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환자실에 도착해보니 수술이 막 끝난 상황이었고 의사선생님은 수술은 했으나 뇌출혈이 너무 심해서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며 누워 있는 오빠를 보니 험악하고 고단하게 살아온 오빠의 삶이 저의 가슴을 짖눌렀습니다.
‘외롭고 힘들었다고 말하지 그랬어~ 왜 혼자 이렇케까지 만신창이가 되도록 걸어온거야.......’
오빠는 8년 전 이혼 후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며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일용직으로 일하며 술과 살았습니다. 내성적인 오빠는 부모 형제와 연락을 끊기 위해 전화번호를 자주 바꿨습니다.
오빠 소식을 친정자매들에게 모두 알렸고 미국 둘째언니는 탑승권이 딱 한 좌석이 남아있어 다음날 바로 귀국했습니다.
오빠가 살던 원룸 집에 가보니 처참했습니다. 원룸 건물주는 방을 빨리 빼줄테니 나가라며 그간 오빠로 인해 힘들었던 것을 토설했습니다. 오빠와 최근까지 일했던 지인은 오빠가 늘 자살을 말했으며, 오빠 집에 와보니 이미 살아갈 소망을 사단에게 모두 빼앗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차에 목장가족들과 목사님께서 바쁘신 와중에도 먼길 마다 않으시고 오셨습니다.
하루 한번 뿐인 면회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으나 간호사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면회를 얻었습니다.
“목사님, 간호사에게 쫓껴 날 때까지 오빠와 시간을 가져 주세요”
저는 들어가지 못한 채로 목사님과 함께 네 분만이 비장함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가셨고 한참이 지나서야 밝은 얼굴로 나오셨습니다.
복음을 들은 후 오빠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손가락으로 두 번의 반응을 보여, 의심 많아 재차 영접을 확인하셨던 목사님의 마음에 구원에 확신을 주셨다는 말씀에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중환자 대기실에 있던 형부와 자매들에게 “만약 장례가 날 경우 오라버니께서 복음에 반응을 2번이나 보이셨으므로 가족들이 원한다면 교회장례로 인도해드리겠습니다”라고 쐐기를 박고 가셨습니다. 역시 주님의 역사하심은 "Timing"입니다.
경찰이 딸 주소지에 갔으나 그런 사람 없다고 돌아왔는데 저와 동생이 다음 날 같은 주소지에 가서 오빠의 전부인과 만났고 오빠가 죽기 전, 딸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던 그 딸과 상봉케 되었습니다.
장성한 딸은 아빠를 작년부터 계속 찾았었노라며 오열했습니다.
임종을 준비할 때가 왔다며 병원에서 급히 호출이 있었고 저는 장례식장을 미리 알아보면서 병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마음을 정했으나 주님의 이끌림에 성남시에서 운영하는 장례식장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한 그곳에 빈소가 꽉찬 상태였으나 오빠 소천 후 빈소가 마련되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비신자 유가족에게 교회장례로 주관할 것을 담대함과 단호함으로 동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찰서에 사건 진술서를 작성하러 간 사이 장례식 상담실에서 일반장례로 변경될 위기에 처했었는데 제가 도착할 때까지 장례절차에 대한 상담을 멈추게 하였고 주님이 뜻하신 대로 교회장으로 장례는 인도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남시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지만 4번의 장례 예배 중에 평일 교통이 막히지 않은 것도 은혜였습니다. 입관식이 30분 늧춰졌는데 때마침 목사님께서 오셔서 유가족들이 고별사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미안해~ 오빠” 모두의 동일한 고별사는 오빠를 오랜 세월 홀로 외롭게 지내게 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되었습니다.
2교회 천경헌목자님께서 위로예배를 인도해 주셨는데 숙연함 속에 주님의 사랑이 전달되었습니다. 오빠의 육신은 화장 후 허망한 유골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유골이 담기는 봉안함을 선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는 영적인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봉안함에 십자가가 선명히 새겨진 후에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큰 언니는 사주팔자를 굳게 믿는 터라 49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승리한 성도의 위패를 절까지 이동할 수 없도록 막아 주셨습니다.
2남 5녀중 두 아들이 친정어머니를 앞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딸 다섯은 모두 서로에게 싸움닭처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빠의 장례로 행복을 여는 가족들이 보여 주신 기도와 사랑으로 강팍했던 자매들의 마음들이 녹아졌으며 3년간 말도 섞지 않았던 자매간에 용서의 마음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한 알의 밀알이 되도록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알 수는 없으나 한 인생의 삶 속에 끈임 없는 선택이 있었지만 오빠가 종국에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우리 주님이 인도하셨음을 믿습니다.
남은 비신자 가족들이 교회를 건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풍성한 삶과 주님 밖에 있는 안타까운 삶 중에 나는 어디를 선택할 것인지 그 답은 명확해졌습니다.
퍼즐이 완성되어지고 해피 엔딩 드라마는 이미 주님께서 연출하셨으니 말씀 안에서 대본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기적이 상식이 되어지도록 응원해주시고 힘주시는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2교회 목장가족과 우리 행복 가족들에게 유가족을 대표하여 송구함과 감사함을 전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에 험한 십자가 지시고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부활하셔서 우리 인생에게 영생복락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