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3 팜팡가 목장) 김광수 집사, 2018.3.25.
안녕하세요. 3교회 팜팡가 목장의 김광수입니다.
저는 아직도 투병중이지만 부활절을 앞둔 종려주일에 이번 겨울에 겪었던 저의 경험을 토대로 은혜를 나누라고 하는 성령님의 권고를 받아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때까지 저의 건강을 한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세상 어디에 내 놓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팽배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겨울을 넘기면서 ‘연약한 인간 중 가장 연약한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잠시도 살 수 없는 존재이구나’ 라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의사 소견으로는, 벌써 이 병의 징후가 오래전에 왔었다고 합니다. 제가 실종됐던 것은 2017년 연말에서 새해 1월 첫주까지 였지만 요즘 시간이 많으므로 차근히 생각해보니 실종됐던 기간은 병증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고 그 짧은 기간에 의식의 단절과 함께 많은 꿈같은 시간이 나를 통제해 왔던 시간이었습니다.
안산의 상록수역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어떤 프레임이 나를 가둬서 하루밤을 오도가도 못하게 해서 그 추운 겨울밤을 떨면서 지냈습니다. 멍청히 앉아서 외국근로자들 오가는 것을 지켜 봤고 스토리웨이(구 홍익회) 상점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쫓겨난 일 등이 생각났습니다. 또 석계역 근처에서 방황하던 일, 북한산 근처에서 버스카드 찍지 않아서 버스에서 추운 겨울날 쫓겨나서 밤새 사우나, 목욕탕집에서 벌벌 떨면서 하룻밤 지내던 일, 도봉산 근처 방학동에서 초등학교에 들려 멧돼지 출현시 행동요령 등을 읽으며 어슬렁대다가 편의점에 들려 꾸벅꾸벅 졸다가 쫓겨나고 길 가다가 매운탕집에 들려 그 집 메뉴인 ‘얼큰 수제비’를 3인분정도 시켜서 먹는 일, 용문산이 있는 중앙선 양평의 용문역에서 선로보수용역 노무자로서(그런일 해본적 없음) 하룻밤, 오도가도 못하고 역에 갇힌일(지금도 에스컬레이트 기계음, 즉 에스컬레이트 사용 요령 안내멘트) 생생하게 기억하며 역의 승강기의 버튼마저 손에 익음)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또한 가는 곳마다 체크카드를 긁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이런 적도 있습니다. 구랍 말일경 목장예배를 앞두고 일을 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20군데의 당일 일정 중 일을 한곳인지 아직 안한곳인지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일상이 완전히 깜깜해지는 경험도 있었으며(매일 밥 먹고 하는 일인데도...) 내 거래처를 차를 타고 빙빙 돌기만 하다가 귀가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했더니만 그들 조차도 ‘천운이구만....’ 즉 하늘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일겁니다.
가장 압권인 것은 실종됐던 1월초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북 영주시에서 4~5일간 방황하던 일입니다. 중앙선 기차를 타고 영주시에 들려(그때는 차를 어떻게 탔는지도, 왜 탔는지도 모르고 체크카드도 모두 분실한 상태여서 무일푼이었습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다녔습니다. 그 기간에는 먹지도 못하고 새벽에 잠잔곳(경찰이 부량자들을 위해 마련해준 임시거처)을 떠나 하루종일 약 100km가량을 걸어서 이동하였는데 경찰 말로는 3일간 동일한 구간을 3일동안 똑같은 모양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그때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가 영주시에 있는 것을 처음 알았으며 마지막에 아들에게 인도된 곳도 부석면의 부석파출소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영주에서는 기막힌 일들이 많았는데 시간상 생략하고, 제가 영주시의 변두리 한 민가에만 3일째 들려서 불안하게 된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어 우리 아들에게 연락이 가게 된 것입니다.
큰아들이(동휘) 저의 동생인 삼촌과 함께 그 밤에 영주까지 와서 데리고 서울의 강남세브란스의 응급실에 입원 시킴으로서 저의 방랑기는 끝나게 됩니다. 그때 가장 극적인 내용은 약 10일간 비몽사몽안에 운전도 하고 정처없이 돌아다녔는데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무사히 귀환 한 것은 우리 주님의 촘촘한 방어망 때문임을 알고 감사에 감사를 하였습니다.
사실상 이 간증의 내용은 자세히 여러분께 설명하려면 하루종일 시간을 할애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번일을 계기로 가장 힘들었을 저의 육친들 특히 2명의 누나들(큰누나는 실종 후 가평군, 서울근처의 기도원은 다 뒤지고 다녔고, 작은누나는 날마다 저의 방으로 찾아와서 옷가지 정리를 하며 눈물로 기도 하였습니다)이 있고 우리 교회의 목자.목녀를 비롯하고 목장식구, 저를 염려해 주시고 기도해주신 담임목사님과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이 미련한 자를 어디에 쓰시려고 끝까지 보호하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느날 장영용 목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의 말씀으로는 ‘뇌경색 환자가 위험한 것은 그렇게 쏴 다니다가 넘어져서 머리가 땅에 부딪히면 반신불수 되는겨’라고 걱정해 주셨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추운 소한절기에 넘어졌더라면 벌써 얼어 죽어 병풍뒤에서 향 냄새 맡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기적적인 사건 뒤에는 항상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을 믿습니다.
제가 정신 못 차릴 동안 또한 생업의 본사 사장님은 재빨리 인원을 수배하여 저의 거래처에 대신 일을 해 주는 사람을 배치하여 도와주셨고 또 우리 작은 자형은 내 거래처를 매각 처리되게 조치를 취하며 금전 손실을 최대한 막았으니 이는 여러 모양으로 촘촘한 하나님이 도우심과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임을 말씀드립니다.
이제 일산 작은 누나집에서 걱정없이 가료하게 된 것도 누나와 자형의 배려 때문입니다. 큰누나의 딸인 생질녀가 호주, 뉴질랜드 여행 계획을 미리 준비하여 뇌경색 치료용 유명한 약을 1년분 구입하게 한 일도 “여호와이레” 하나님의 눈부신 촘촘한 보호 때문임을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는 것이 저의 숙제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올인 할 생각이며 받은 사랑을 그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로 이미 두 아들을 주님품에 안겨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계획한 일이 대심방의 자리를 살리는 것이고 이게 두 아들이 교회에 첫 발(비록 목장예배에 우선 참석)을 떼었으니 이제 하나님과 목자이신 사모님께 공을 넘겨 드렸으며 두 번째 과제는 비록 당장은 자격이 안되지만 자격을 구비하게 도와주십사고 간구하며 매달릴 것은 목자의 비젼입니다. 그래서 다음주는 부활주일인데 성령님께서는 제게 오늘 굳이 간증을 준비 하라고 마음의 부담을 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사는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계획하기 위해 살리셨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도록 옳은 방향을 설정케 도우신 행복을 여는 교회 우리교회 담임목사님께 감사드리며, 신실한 종인 3교회 목자 임선수 목자님과 박월식 목녀님, 강한 믿음의 동반자들인 3교회 식구들, 몸된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와 존경을 표하며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